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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입에 네게 있으면 그 입 다가지고..
suhbh7
2009. 1. 9. 13:13
바람직한 예배음악을 위한 성경적 고찰
박 정 순(총신대학교 명예교수)
목적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다양한 사역과 교육 프로그램 등의 계발로 새로운 교회문화가 형성 되어가고 있다. 반면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인 예배에 있어서는 경건한 분위기가 많이 손상된 듯하다. 특히 예배음악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음악이 지니는 고유한 기능과 함께 예배음악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런 인식 아래 성경의 조명을 통한 예배음악의 본질이란 차원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1. 음악의 특성
음악이란 사람의 감정과 사상을 소리에 담아내는 예술이다. 가사가 없어도 음악 자체에 담겨져 있는 영감이 감정과 사상을 나타낸다. 이것을 음악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생명이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 하는 것이 음악의 특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한자 ‘노래 가(歌)’자는 ‘말에 곡조를 붙여서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의 감정을 나타내는 소리’ 라고 풀이한다. 음악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주로 음으로 나타내는 소리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한다. 슬프게 하거나 상쾌하게 하거나 또는 쓸쓸하게도 만든다. 헤비메탈의 대부였던 오지오스본의 노래인 ‘Suicide Solution’ 노래를 듣고 세계적으로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을 했다는 유명한 사건도 음악의 이러한 힘을 증명해 주는 것일 것이다. 요즘 지하철 내에서 자살예방 음악이 송출되고 있기도 하다. 이 음악들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음악, 머리를 맑게 해주는 음악, 심신 안정 및 피로를 풀어주는 음악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처럼 음악은 시각적인 어떠한 것 보다 더 자극적이다. 음악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도 할 수 있는 마력을 갖고 있다.
또, 음악을 들으며 아이들의 두뇌가 자극을 받아 지능 발달이 이뤄진다는 것은 이른바 ‘상식’에 속한다.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라우셔 교수팀이 발표한 ‘모차르트 효과’ 즉,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기만 해도 뇌의 활동이 촉진되어 지능이 향상된다는 이론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뒤 학문적인 반박이 계속 되고 있지만 음악의 교육적 효과마저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유아 시기는 창의력, 논리적 사고, 도덕성, 감성 등의 특질이 결정되는 ‘결정적 시기’로 음악교육이 꼭 필요한 때다. 음악은 두뇌를 자극해 뇌의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정서적 발달에도 크게 관여한다.
음악을 듣는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청각은 오감 중에서도 아주 빨리 발달하기 때문이다. 태아는 6개월 정도면 청각기능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다. 자극을 받기가 힘든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소리에 더 민감해진다. 일찍부터 뇌에 자극을 줄 수 있는 태교음악의 중요성은 그래서 강조된다. 이뿐 아니다. 음악은 치료를 위해서도 사용된다. 음악치료는 음악을 치료의 매개체로 사용하여 정서적, 사회적,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치료의 한 형태로서 음악과 과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예술적, 창조적, 과학적인 치료이다. 이 치료는 모든 인간이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선천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고대 그리스 사상은 음악이 윤리적 삶에 영향을 준다는 신념, 음악이 특수한 효과와 기능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정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견해에 뿌리를 박고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아리스토 크세노스는 음악은 정서적인 것이고 청자의 듣는 행위와 지적 능력 두 가지 모두에 필연적이고 기능적 역할을 충족시킨다고 하였다.
음악이 자극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감정, 그리고 지적 능력만이 아니다. 식물이 음악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거나 음악을 틀어주면 병충해에 강해지고 열매도 더 많이 맺는다는 사실도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비트와 사운드가 강한 록 음악보다는 고전음악을 더 좋아하고 타악기 보다는 현악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미국의 과학자 도로시 레털렉은 호박에 고전음악을 들려주자 호박 덩굴이 스피커를 감싸 안은 반면, 록 음악을 틀어주자 덩굴이 벽을 넘어 달아나려 한 사실을 밝혀냈다. 중국 위난성에서 자라는 콩과 식물 ‘무초(춤추는 나무)’는 클래식 음악만 들려주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듯 잎사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기이한 식물이다.
이상의 사례들을 통해서 나타났듯이 음악은 언어보다 훨씬 직접적이며 강렬한 영향력을 생물체계에 행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음악은 사람의 감정과 사상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의 영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이나 예배음악이 갖추어야 될 음악의 영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즉, 아무리 좋은 가사로 노래해도 음악이 갖는 영성과 그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거짓 노래가 되고 만다.
2. 교회음악과 예배음악
교회음악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사용하는 모든 음악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고, 성경을 중심으로 한 본문을 가사로 하여 작곡된 음악을 교회음악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또한 유럽의 대학들에서는 교회음악을 ‘신교음악’ 과 ‘구교음악’으로 구분하여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Church Music’ 또는 ‘Kirche Musik’을 번역하여 교회음악이라고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교회음악을 예배 음악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과 관계되는 모든 음악’이라 하고, 예배음악은 그 중에서도 ‘예배 시에 행해지는 음악’으로 정의한다.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의 생활과 문화 또는 종교 개혁의 중심 국가였던 독일의 생활과 문화를 연상하면 교회 음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신정국가 또는 국교가 기독교인 국가였으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종교의식을 배제할 수 없었다. 또 모든 행사가 종교의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거기에는 반드시 음악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의식음악이 작곡되고 연주되었다.
구약시대의 히브리인의 문화는 하나님 중심이었다. 신정국가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고 그와 같은 의식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형식면에 있어서는 모두가 교회음악이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며 천지와 바다의 모든 동물도 그리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시 69:34). 음악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사 43:21).
R. E. Webber는 그의 저서 ‘예배의 역사와 신학’에서 ‘구약성경은 창조를 언급하며 창조자를 노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이 말하는 창조를 떠나서 음악을 논 할 수 없다. 그 구속의 역사를 떠나서 음악의 의미론적 통일성을 말하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있고, J. P. Baker는 ‘Love and Love of God’ 에 수록된 논고에서 ‘야훼하나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피조세계의 대표) 사이의 관계의 본질로서 사랑을 말하지 않고는 음악의 목적을 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음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와 같은 동기와 목적이 없으면 교회음악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며 역으로 그와 같은 목적과 동기가 분명하면 그것은 교회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창조와 구속과 섭리의 역사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놀라운 기록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해야하는 마땅한 명분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찬양할 수 있는 신분의 영광스러움과 경이로움 때문에 감격하게 한다. 이와 같이 히브리인의 삶의 역사 속에서 교회음악은 곧 예배음악이었다.
중세시대의 예배에서는 예배음악이 사제들의 전유물이었고 회중이 그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예배음악은 논하지 않기로 한다.
한편 유럽의 교회음악은 종교개혁과 함께 성도들의 열렬한 신앙심과 더불어 예배와 깊은 관계를 맺고 꾸준히 발전하여, 바하와 헨델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독일을 위시한 기독교 국가들에서는 결혼식, 장례식, 왕의 대관식, 또는 생일 등 각종 기념일을 위한 음악이 미사곡형식으로 작곡되었고, 이러한 모든 행사들이 예배 형식을 통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교회음악들이 작곡 되었다.
음악가들 자신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담은 좋은 작품들도 많이 있다. 시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신실한 신앙고백형의 시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시에 붙여진 주옥같은 음악은 훌륭한 교회음악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은 훌륭한 예술가곡으로서도 평가를 받는다. 사실 유럽의 문명과 문화는 대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산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유럽을 여행하면서 미술, 조각, 건축 등 모든 분야와 음악의 유산을 관심 있게 본 사람들이라면 이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만나며 스스로 자신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 회중은 예배드릴 때 오늘날과 같은 예배행위를 할 수 없었고, 다만 정해진 기도문을 외운다거나 간단한 복창만을 할 수 있었다. 죄를 고백하는 것도 고해성사를 통하여 사제가 대신하였으니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예배의 축복은 성도의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의식을 통한 종교생활만을 하였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실제로 많은 축복을 받게 하였다. 따라서 역사를 통하여 볼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는 영적부요와 삶의 변화를 가져 올 뿐만 아니라 개인적 신앙고백이 가능해지면서 성령의 충만한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창조력과 표현의 능력을 통하여 불후의 명작들을 낳게 되었다. 이것이 곧 유럽의 문화유산이 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이다.
유럽문화는 기독교 중심이고, 그것이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아름다움과 예술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의 수와 양,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명작들을 보면서 그것이 믿음의 소산이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음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직접적인 수단이므로 그 진보가 더욱 빠르게 나타났다. 교회음악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모든 음악의 산실이 되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하는 요소가 있는 모든 음악은 다 교회음악에 포함될 수 있었다.
사실 J. S. Bach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음악이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였다. 그는 모든 작품에 ‘SOLI DEO GLORIA’ 라고 표기하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교회음악가였고 평생을 교회에서 일했지만, 오늘날 가장 위대한 음악가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음악형식의 대부분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이 시대의 독일 음악은 대부분 교회음악이며, 명제가 붙은 세속음악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 대부분은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최초의 음악학교도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음악의 역사적 흐름을 볼 때 신정국가라든가 기독교가 국교였던 나라에서의 예배음악과 오늘날과 같이 정치적 종교적 배경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의 예배음악은 현저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예배와 함께 예배음악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엄격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신학과 교리를 새로이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도 이전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양상을 띠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회중의 예배 참여와 개인적인 신앙고백의 실행은 엄청난 삶의 변화와 회중들의 자각을 가져 왔으며, 예배의 혁신은 많은 논란을 거듭하면서 예배음악을 정착시켰다. 종교개혁 당시에 음악에 대한 논쟁은 신학 논쟁 못지않게 심각하였다.
예배음악의 변천은 개혁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첨예한 대립과 논란의 과정을 겪으면서 이루어 졌다. 사실 종교개혁이후의 100여년간의 교회음악 역사는 예배음악과 교회음악의 본질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하여 많은 장을 할애하였다. 신학자와 음악가는 얼마나 열심히 예배음악을 연구하고 실천하였는지 이 시대의 문헌을 보면 가슴이 뭉클 함을 느낀다.
종교개혁의 주역인 루터는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면서 하나님께서 찬양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성경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는 38곡이나 되는 찬송가를 직접 만들었고 Johann Walter(1496-1570)와 함께 ‘Wittenberg Gesangbuch’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다. 이후 Bach시대에는 ‘Neumeister’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예배음악의 가사를 직접 만듦으로써 신학적 뒷받침을 충분히 하였고, 이것이 회중찬송의 발달과 교회음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예배음악에서 사용 되는 가사들이 엄격하게 선별되었으며 가장 훌륭한 음악가들이 교회음악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이 100여년 동안이나 계속 되어왔다는 사실을 볼 때 예배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교회의 음악 감독이었던 Bach는 매 주일 예배를 위하여 Kantata를 작곡하였는데 그 가사는 교회력에 의한 주일 설교의 내용을 요약한 것과 회중의 신앙고백이었다. 이러한 Kantata의 작품 수가 295곡이나 되었으니 6년 동안 매주 다른 곡을 예배 때마다 연주하기 위하여 작곡한 셈이 된다. 그 가사를 선택함에 있어서 많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으며, 많은 토론과 회의를 거쳐 정착하게 된 기록들을 볼 수 있다.
루터교인인 Bach 등은 Kantata의 마지막 부분에 Schluss Chor(마지막 부분에 간단한 멜로디로 된 합창곡 또는 단선율의 민요 곡조에 성경가사를 붙임) 를 도입하여 회중이 성경 말씀을 가사를 통하여 노래함으로써 회중의 예배 참여의식을 활성화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회중찬송의 모태가 되었다. 이 시대의 Kantata는 예배 음악곡으로 작곡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연주회용으로만 사용한다.
Calvin은 음악에 대하여 비교적 엄격한 입장이었다. 교회 안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시편가로만 제한하였는데, 그 이유는 음악의 영향력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합당치 아니하며 가장 순수하고 성령 충만한 찬양은 다윗의 시편 이상 없다고 생각하여 시편가와 몇 개의 Canticle 만을 고집하였다. 특히 악기 사용은 절대 금하였는데 신앙고백이 없는 즉 가사가 없는 음악은 찬양으로 합당치 않다고 하였다. 사람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신앙고백만이 찬양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에 오르간음약의 화려한 기교는 오히려 세속적인 것으로 인간의 순수한 내면의 영성을 흐리게 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예배에 합당한 경건한 음악은 오직 성령 충만한 심령에서 나오는 노래뿐이라고 하여 모국어로 시편가를 부르게 함으로써 말씀의 내용을 깨닫고 찬양을 배우도록 독려하였다. 음악의 순수한 영성을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예배음악의 본질적인 문제를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편, 이태리에서는 성악이 발달하면서 오페라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이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면서 점차 유럽 전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독일의 젊은이들 또한 예외 없이 오페라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경건주의 사상이 나라를 지배하였기 때문에 이 세속 오페라의 진입을 강력하게 막았고, 그에 대치하여 오라토리오 음악이 발전하게 되었다. 오라토리오란 성경의 내용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혹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본문으로 하여 작곡한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연주회를 위하여 작곡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음악의 한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어 복음 전파의 몫을 담당하였으며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오라토리오로는 헨델의 메시야(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수난. 부활.), 하이든의 천지창조(창세기 이야기), 멘델스죤의 엘리아(왕상 17-19장) 및 바울(사도바울의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교회음악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기 위하여 매우 적절한 예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개혁과 함께 예배음악은 교회음악 중에서도 예배를 위한 음악으로 그 엄격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즉, 예배음악은 예배의 모범에 따라 결정된다.
3. 바람직한 예배음악을 위한 성경적 접근
흔히들 시대를 따라, 문화를 따라 찬양이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영성이 세속화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음악을 교회에서 연주할 수 있는지 특히 예배음악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리고 누가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 예배음악에서는, 작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영성이 더욱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음악은 매우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 보거나 듣기에도 민망한 개인이나 단체들의 연주가 무비판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고, 젊은이들의 기호를 맞춘다는 명분 아래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환상적 감정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세속적인 연주를 묵인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교회음악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시하고, 가사만 성경과 관계되는 것이면 모두가 교회음악이라 여기는 탓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맞는 건전한 교회음악의 계발이 시급하며 교육이 필요하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하며 음악 또한 정직하고 성결한 영성을 지녀야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드려져야 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자는 경건한 자세를 잃으면 안 된다. 예배를 축제라 하여 세속적인 Carnival과 같은 개념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보수신학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예배음악을 지키는 것 또한 교회를 위해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오늘날의 바람직한 예배음악을 위한 성경적 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약성경은 예배와 음악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예배란 하나님을 인식할 때 비로소 행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시며 그의 백성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예배행위자로서 그 관계와 교제가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음악은 회중을 예배의 위치로 이끌어 간다. 그것은 최고의 영적, 그리고 음악적 수준을 목표로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실재적인 영적 사역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편 22편 3절의 본문은 예배에 있어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시편 22편 3절에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편 22편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언한 시로써 잘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 아름다운 예배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간절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의 모습, 십자가 위에서 대속하신 메시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한 감격,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마침내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찬양하는 성도의 모습, 주께 서원을 갚은 감사의 심정, 열방과 그 후손 대대로 주의 이름을 전하여 영원토록 찬송 받으시도록 외침을 다짐하는 믿음의 선포로 어우러진 생생한 예배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부언하면 이 찬송의 핵심인 하나님의 보좌는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배음악의 요소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둘째,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찬양해야 하며; 셋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넷째, 창조와 구속과 섭리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해야 한다. 이것이 정직한 자의 마땅히 행할 바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시편 33장 3절에서는 ‘새 노래로 공교히 연주하라’ 하여 연주의 내용과 함께 테크닉 면에서도 최고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공교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막의 양식을 설명하셨던 용어로써 예술적 극치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시편 22편에 찬송을 하나님의 보좌라 했으므로 찬송 또한 공교히 불러야 한다. 결과적으로 예배음악이란 예배자들이 자신들의 최선을 다해 드리는 음악이다.
예배음악의 모범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구약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인간은 그 찬양을 선도해야 한다(시69:34).
②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대로 쓰임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찬송을 부르기 위하여 태어났다(시43:21).
③ 찬양은 정직한 자의 마땅한 행할 바이며, 찬양은 아름답고 공교하게 연주해야 한다(시 33:3).
④ 우리들의 찬송은 곧 하나님의 보좌이다. 따라서 성결하고 거룩한 영으로 찬송해야 한다(시22:3).
⑤ 하나님을 만나는 곳, 곧 예배하는 전은 거룩한 곳으로, 회개와 경배와 축복을 경험한다(사6:1).
신약에서는 감사와 기쁨과 영광의 찬송을 할 뿐 아니라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가르친다. 성도가 함께 찬양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음악으로 표현하여야 한다.
에베소서 1장은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설명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이유에 대하여 언급한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 이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녀로 삼으시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셨다(엡 1:3-6); 성자 예수님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시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사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그 안에서 기업이 되어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셨다(엡 1:7-12);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을 인치시고,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셨다(엡 1:13-14).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라는 말씀은 교회의 영광스러움과 지체된 성도들의 영광스러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없는 감격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땅히 찬송할 이유와 명분을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이것은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최고의 경지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기쁨과 감사의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양의 모범을 가르치고 있다:
①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요 4:24) 성부 성자 성령님을 향하여 찬양하며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하라(엡 1장). 지식이 없으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교훈을 받아야 한다.
② 믿음으로 해야 한다(히 11: 6).
③ 고난 가운데서도 찬미하라(고후 1:3, 행 16:25). 고난 가운데 받는 하나님의 위로는 매우 신비한 것이다. 고난은 크나 큰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게 하며 믿음의 수위를 높인다.
④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행 2:47).
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불러야한다(엡 5:19; 골 3:16).
⑥ 모든 성도와 함께 영원토록 힘을 다해서 해야 한다(계 14:2, 3).
결론
성경적 조명을 통해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의 찬양은 예배음악의 본질적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배자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이름과 인격과 하신 일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죄를 위하여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배의 조건은 성령께서 감동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감사와 감격의 표현으로 나오는 찬양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하였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찬양하라 하였다.
찬송은 성도의 특권이며 의무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찬송할 수 있고 또 찬송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나의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사랑 고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찬양할 수 없다. 동시에 확실한 소속의 매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정직한 영의 신령한 노래가 아닌 것을 찬양이라 할 수 없다. 인간적인 감상에 빠져 자신의 감정에 열광하고 흥분하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하며 사람들을 의식하고 인간을 향하여 예배 찬송을 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배 찬송의 내용은 말씀을 근거로 하여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감동이 일치 되는 것이어야 하며 음악에 있어서도 경건과 영적 수준을 지켜야 한다.
예배음악은 곧 예배이다. 음악은 예배의 수단이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찬송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음악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즉, 음악 속의 사상이나 감정은 혼연일체 믿음의 고백이요, 기쁨의 감격이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찬송은 하나님의 보좌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의 자세가 어떤가는 곧 음악을 통하여 나타난다. 소리는 정직하며 꾸밀 수 없고 성대는 성형할 수 도 없다. 소리에는 정직한 영혼의 고백,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의미가 소리에 담겨져 있어야 한다.
음악이 예배의 한 요소라고 또는 예배 중의 하나의 순서라고 생각한 것은 큰 오해이다. 음악은 회중을 예배의 위치로 이끌어 간다. 찬양은 최고의 영적 수준과 음악의 수준을 목표로 한다. 또한 음악과 영성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몸으로 익히는 기술이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음악에 훈련되지 않은 유명한 음악가라든가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음악을 지도하고 예배에서의 음악 사역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 한 현상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서의 음악 사역자들은 항상 성령 충만하고 높은 음악수준을 지향해야 하며 영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설교자 못지않게 기도하고 준비하여야 하며 성경의 가르침에 민감하여야 한다. 오르간 전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후주에 이르기까지 예배의 순서는 하나의 음악의 줄에 꿰어진 보석들과 같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자와 예배음악 사역자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모범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하나의 요소가 아닌 예배 그 자체라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예배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예배음악은 예배자의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