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 있는 설교를 위하여
생명력 있는 설교를 위하여
청중의 반응에 일희일비 말고 등장인물과 함께 숨 쉬어야
김종만
이틀 후면 주일이 다가오기 때문에 어김없이 교회에서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차례로 찾아오는 마음속의 고민이 있다. '오늘은 무슨 설교를 할까?'에서 시작해서, '나의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이 은혜를 받을까?', '이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청중들은 변화를 받을까?'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통하여 청중이 이성적이든 감정적이든 실천적이든 무언가 변화되기를 원한다. 비단 이것은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작가나 독자의 관계에서나 사람들과의 일반적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말하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들의 말과 글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항상 염두에 둔다. 그 반응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반응이 '긍정이냐 부정이냐'라는 결과에 따라 화자(話者)와 필자(筆者)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감정의 교차를 경험하게 된다. 화자나 필자는 말과 글을 통해서 청자(聽者)나 독자(讀者)가 자신들의 소리에 교감해 주기를 원하고 동의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특히 청중을 상대로 하는 설교자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당시 수많은 수사학적 변론을 통해 각광받았던 소피스트들은 화려한 입담이 철학적 근본 문제에 천착(穿鑿)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화자와 필자가 자신들의 말과 글을 통해서 청자(聽者)와 독자(讀者)들의 반응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들의 말과 글로 인해 영향을 받는 청자(聽者)와 독자(讀者)를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Language is the house of the truth of Being)라고 했다. 언어는 단순히 사람들 간에 무언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소극적 기능이 아니라 언어가 곧 존재성을 결정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를 포괄하는 외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존재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좀 더 비약(飛躍)해서 말해 본다면, 사람에게 언어가 없다면 자신의 존재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어 언어란 '자아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통해서 명백해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언어의 힘이 사물의 존재성을 결정해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꽃이라는 사물은 꽃이라는 언어가 있기 때문에 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꽃의 보편적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꽃의 존재가 있다는 중세의 실재론(Realism)이 맞는지, 꽃의 보편적 실재에 대한 인식은 개별자인 꽃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온건한 실재론(Moderate Realism)이 맞는지, 아니면 꽃의 보편적 실재는 단지 이름에 불과한 허구이며 꽃의 개별자만 존재한다는 유명론(Nominalism)이 맞는지는 여기서 갑론을박(甲論乙駁)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가 있음으로 해서 사물의 존재성이 규정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우리 부부에게는 두 살 된 귀한 아들이 있다. 그의 이름은 '영우'이다. 영화로울 '영'(榮)과 도울 '우'(佑)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돕는 주님의 백성이 되라는 의미에서 붙여 준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태명은 '지인'이었다. 지혜 '지'(智)와 인자할 '인'(仁)인데, 지혜롭고 인(仁)의 한자 모양새와 맞게 두 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사실은 우리 부부가 태명을 '지인'이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우'가 앞으로 이 말을 들으면 섭섭해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첫 아기가 여자 아이이기를 원했다. 만약 여자라면 '지인'이라는 태명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남자 아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우리는 다소 여성적 뉘앙스를 가진 '지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아들이 '영우'가 되었다.
아기가 태어나서 '영우'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에게 이 이름을 사용하자니 왠지 어색했다. 이미 엄마 뱃속에서 열 달 가까이 이 아기는 '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영우'인 이 아기를 보고 가끔 '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친(親)-외(外) 조부모(祖父母)들도 마찬가지였다. 아기는 그대로인데 그 이름이 단지 지인에서 '영우'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 아들에게 '지인'이라는 이름도 '영우'라는 이름도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 아기는 그냥 아기에 불과하다. 아기라는 보편성만 있지, '지인-영우'라는 개별성은 가지지 못한다.
개별적 이름, 즉 언어가 없는 아기는 생명의 외피만 가진 육신만 존재할 뿐이다. 이 아기가 온전한 자아를 가지기 위해서는 아기라는 육체에 언어가 주어져야 한다. 우리 부부가 그에게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곧 아기라는 보편자에서 '영우'라는 개별자를 가진 '자아적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한낱 사물이라는 보편성으로 존재해 있던 꽃이 그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사물이 개별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언어란 사람의 존재성을 결정짓는 힘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단순히 청중의 반응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보다는 설교하는 순간에 자아를 찾는 존재론적 본질을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위화'는 글을 쓸 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독자의 반응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함께 숨을 쉰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쓸 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설교자도 메시지를 전할 때, 어떻게 전할 것인가 혹은 청중의 반응이 어떠할까를 고민하지 말고, 오로지 내용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등장인물과 함께 숨을 쉰다면 그 설교는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역설적일지 모르겠지만 글을 쓸 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고 말한 '위화'처럼, 설교라는 언어를 통해서 말을 전할 때 '나'가 사라져야지 그 언어를 통해서 나의 자아가 말과 함께 실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