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가 이어진 24일 오후. 조기연(44·우리가꿈꾸는교회)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삼각산(북한산)에 올랐다. 한참을 걷던 조 목사는 산 중턱 바위에 자리를 폈다. 서울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기자도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찬송가 한 장을 부르기도 전에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이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민족이 되게 해 달라는 울부짖음도 이어졌다.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고 전도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도록 간구했다.
“주여, 주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다퉈 외쳤다. 두 손을 들고 드린 통성기도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어느새 ‘무겁던’ 기도는 사라지고 감사와 소망이 가득 담긴 기도가 메아리로 길게 울려 퍼졌다.
삼각산은 수십 년 전부터 한국교회의 ‘눈물의 동산’ ‘기적의 동산’ ‘능력의 봉우리’로 불린 곳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곳에서 하나님과 만나려고 기도의 줄을 붙잡았다. 금요일 밤이면 산 속 곳곳에 있는 130여개의 기도터와 제단에서 기도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밀알기도원 감람산기도원 제일기도원 등은 연일 계속되는 집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뿐 아니라 개인의 문제도 주님 앞에 내놓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김익두 길선주 한상동 강달희 신현균 조용기 이만신 김홍도 피종진 이태희 목사 등 수많은 목회자들도 이 같은 산기도에서 해답을 찾곤 했다.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며 끈질기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기도자들을 신비로운 세계로 인도하셨다. 기도는 곧 영적 전쟁이었다. 중요 고비마다 국가는 위기를 극복했고 한국교회는 전 세계가 놀라는 대부흥을 일궈낼 수 있었다. 무장간첩이 침투했을 때나 일촉즉발의 남북간 무력충돌의 위기 때도 ‘삼각산의 기도’는 그치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도는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삼각산은 침묵의 산골짜기로 변해버렸다. 90년대 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등산로를 제외한 출입이 통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정부는 삼각산을 자연휴식년제와 특별보호구역으로 만들어 2000년 1월 1일부터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도의 발길이 줄었다.
정부는 훼손된 자연에 휴식을 주고 환경을 회복하겠다며 통제하고 있다. 여기에다 산중턱을 넘어선 고급 주택가의 확장으로 안면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덧붙여졌다. 기도회 장소가 될 만한 곳마다 줄을 쳐 놓아 출입 자체를 막고 있다. 심지어 보호감시반을 통해 규정을 어기고 기도하는 사례를 적발, 과태료를 물리고 있다.
1주일에 한번 이상 산기도를 드린다는 고인규(65) 권사는 “삼각산 깊은 데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아쉽다”며 “삼각산 기도 열기를 회복해 한국교회 재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근 벧엘금식기도원 김태순(71) 원장은 “기독인들의 기도가 과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 때, ‘영산(靈山)’인 삼각산을 기도동산으로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목회자들은 새벽기도와 함께 세계 교회와 공유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자산으로 ‘산기도’를 꼽고 있다. 주로 기도원 등에서 금식기도와 함께 이뤄지는 산기도는 한국교회의 특징이다. 안락하고 편안한 교회 의자보다는 척박한 곳에서 하나님과 일대일 대화에 집중하려는 불퇴전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은밀한 골방과 토굴, 암혈에서, 그리고 수도 서울의 삼각산 바위에서….
천안함 사태 이후 남북 관계가 더욱 경색되면서 기도소리가 그리워진다. 나라와 민족, 교회의 위기 때마다 기도가 끊이지 않았던 삼각산의 영성이 한국교회의 침체와 침묵을 극복할 수 없을까.
국민일보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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